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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표준용량 제시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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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09:28

현대의약 태동기(4)
명나라 의술 대거유입으로 향약 뒷걸음... 임진왜란·병자호란 불구 의학저술 풍성


세종 15년(1445)에 간행된 향약집성방 이후 자기 나라의 풍토에서 자란 식물이 그 나라 사
람들의 질병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향약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졌다. 이는 그 이후의 실록
에 향약에 대한 내용이 많이 기록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향약에 대한 관심과 처방은 세종 성종 시대에 풍미하다가 연산군 때 와서 쇠퇴의 길
을 걷게 된다. 또 중종이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심해졌는데 이는 향
약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향약이 배척된 것은 명나라와의 교류가 강화
되면서 그 나라 문물에 지배 당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의술이 속속 들어왔고 당약의 수입
도 활기를 띄었다.
당약 수입은 활기


따라서 중종 이후에는 세종 성종 때 번성했던 향약은 꼬리를 내리고 중국 의약학에 지배를
받는 상황으로 내닫았다. 약재는 물론 치료법도 명나라의 이주의학(李朱醫學)을 주로 사용했
다. 향약은 민간의약방 즉 속방(俗方)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세종 20년(1438)에는
상하 2권으로 구성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이 나왔다.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전문적인 검
험서(檢驗書)로 법의학적 지식의 응용은 이 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 원년인 1609년부터 철종14년(1863) 까지의 155년 간의 긴 시기는 조선후기에 해당된
다. 조선후기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혼란한 때 였다. 2차에 걸친 무려 7년
간의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났고 인조 14년(1636)에는 병자호란이 발생해 국가재정의 궁
핍은 물론 국민들의 생활상은 참상의 수준에 이르렀다.
조겷  간의 싸움인 병자호란은 말이 싸움이지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청의 완승으로 끝났
다. 청의 전신인 후금은 조선에 대한 1차 침입인 정묘호란(1627년)으로 조선과 형제지국을
맺었으나 1632년 만주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리며 형제지국
에서 군신지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군신의 예 강요


또 황금 백금 1만량 전마 3,000필과 정병 3만명을 요구했다. 1636년에는 용골대, 마부태 등
을 보내 신사를 강요 하기도 했다. 이에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을 거부하고 조선 8도에 선
전유문(宣戰諭文)을 보내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더욱 강해진 후금은 태종을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나라로 고쳤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 왕자, 대신,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을 경우 공격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화친을 주장했던 주화론자 보다는 싸움을 종용했던 척화론자가 득세해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했고 이에 청 태종은 청, 몽골, 한인으로 군대를 편성한 1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쳐들어 왔다.
당시 조선은 청에 대한 대비 없이 싸움만 강조해 전쟁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의
주부윤 임경업, 판윤 김경징, 강화유수 장신, 유도대장 심기원 등이 청과 맞붙었으나 역부족
이었다. 이에 조선은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 ,원손,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을 강
화도로 급히 피난하게 했다.
인조도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에 막혀 남한산성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청 군
20만명이 남한산성을 애워 싸자 인조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친히 성밖으로 나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삼전도 굴욕을 당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후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
계를 끊고 청에 복속 됐으며 이같은 관계는 청이 일본에 패하는 1895년 청일 전쟁 때까지
지속됐다.
조선후기 피폐상


조선후기는 이처럼 왕이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피폐한 상태가 계속됐지만 의학서
등의 저술에서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 가운데 한의학의 의약전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의 발간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동의보감은 선조 29년(1506)당시 내의원 소속으로 태의 였던 허준 양예수 이명원 정작 김응
탁 정예남 등이 한나라 때 이미 체계화된 한의학을 중심으로 동방의학의 총집성과 함께 민
족의학을 정립시키기 위해 편집을 시작해 15년 후인 광혜군 5년(1613)에 완성한 의약서이다.
시작은 여러 명이 했으나 완성은 허준이 단독으로 했다.
계주갑인자본으로 25권 25책으로 구성됐다. 시작 1년여 만에 정유재란(1592년 임진년에 왜
군이 쳐들어 온것이 임진왜란이며 정유년(1597)에 2차에 걸쳐 싸움을 벌인 것이 정유재란이
다)으로 일시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허준은 필생의 작업으로 저술에 매달려
마침내 세계적인 자랑거리를 만들어 냈다.
실사구시의 실증적 학구의 자세와 예민한 관찰력,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많은 임
상경험을 살린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기록물로 지난 91년 보물 제 1085호로 지정됐다. 이 동
양최대의 의학 사전은 1724년,1799년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됐고 중국에서는 1763년 나온 이
래 여러 차례 복간됐다. 현재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내과에 해당되는 내경편 4권, 외과에 관한 외형편 4권, 유행성병 급성병 부인과 소아과 등을
합친 잡병편 11권, 약제학 약물학에 관한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 목차편 2권 등 총 25권이
다.
병증과 처방의 실질적인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 했으며 출전을 밝혀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치방(治方)을 알기쉽게 정리했고 속방(俗方)을 기재하기도 했다. 도교의 영향을 받았던 저자
는 도교적 공리와 실용주의적 사상에 입각해 정확성과 실용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전해 내려
오는 많은 의서 가운데 핵심만을 골라 이론을 정립했고 특히 임상경험을 중요시 했다.
현대의학 적용가능


주목할 만한 것은 현대의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정(情) 기(氣) 신(神)에 근본을 두어
의술의 본의를 정신수양과 섭생에 두고 복약과 치료는 2차적인 것으로 했는데 이것은 전편
에 흐르는 일관된 흐름이다.
중국에서 나는 약재인 당약 보다는 한국에서 나는 향약의 비중을 높이 샀으며 고서에 표시
된 처방약의 용량이 우리체질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기도 하는 등 임상경험으로 얻은 지식을
살려 표준용량의 기준을 만들기도 했다. 허준은 사망후 보국숭록대부양평군(輔國崇錄大夫陽
平君)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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