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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제약소, 국내 첫 의약품 합성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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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3:22

살바르산 개발, 제약산업 발전 큰업적
매출 30%이상 신약개발 투자 놀라워


유한양행에 이어 1929년 금강제약소가 탄생했다. 금강제약소는 경성약화학연구소에서 명칭 변경된 이름이다. 전용순은 지금의 을지로 2가에서 제약업을 시작했다.
유한양행이 매약의 시대를 치료약의 시대로 바꾸었다면 금강제약은 약 다운 약을 만든 회사로 기록되고 있다. 1902년 개성에서 태어난 전용순은 일본의 사사오까 약방에서 근무한 것을 계기로  약업인의 길을 걷게 된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귀국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약방을 차렸다.


약다운 약 만들어


그러나 얼마 후 서울로 와 동아일보 영업사원을 지내기도 했다.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면서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개최된 공진회 행사를 계기로 큰 돈을 벌었다. 일본말에 능통하고 일본 약업인들과 교류가 깊었던 그는 공진회를 통해 손쉽게 돈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거부가 된 그는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남대문 신세계백화점 근처에 병원을 차렸다.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당시에 많은 성병환자들이 넘쳐났다. 의사 자격증이 없었던 그는 의사를 고용했다. 그런데 의사는 탁월한 실력을 보여 주지는 못할 망정 오진이 많았고 아침 출근 시간도 늦어 환자들은 다른 병원을 찾기 일쑤였다. 거기다 퇴근 시간도 지키지 않았다. 화가난 전용순은 자신이 직접 의사가 돼야겠다고 결심,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의사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따는 오기 정신을 보여 주기도 했다.
금강제약은 승승장구 했다. 1935년에는 살바르산, 머큐로크롬이나 설파아미드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같은 실적은 당시 약업시장을 볼 때 선구적인 것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합성 1호로 기록되고 있는 매독균 치료제 살바르산의 합성 성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살바르산의 합성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전용순은 의약품 합성에 뜻을 두고 일본 경도제대에서 합성을 경험한 나카니시를 초빙했다. 많은 돈이 들었다. 그러나 반드시 합성에 성공하고 싶었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고 성공하기만을 빌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노란색이었던 것이 수개월 후에는 붉은 색으로 변질 됐다. 합성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나카니시는 계속된 연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합성에 성공하지 못하고 장질부사로 사망했다. 이에 전용순은 아예 일본으로 측근인 최병욱을 파견한다. 주사제 제조책임자 였던 경성약전 4회 출신인 그는 경도제대를 찾아가 원리와 의문점 들에 대한 많은 질문과 연구 끝에 한가지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연구한 결과 바로 용매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합성에 필요한 것은 모두 메타놀이라고 책이나 문헌들은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타놀(알코올 동족체 중에서 구조가 가장 간단한 것으로 물의 수소원자 1개를 메틸기-CH3로 치환 한 것) 대신 에칠렌글리콜이 합성에 필요하다는 것을 이태규 박사의 소개로 만난 나카타 교수를 통해 알게됐다.
합성은 성공했다. 전용순과 최병욱은 샛노란 살바루산 결정체를 들고 기쁨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의 손으로 태어난 합성 제 1호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젠바르산이라는 상품명으로 빛을 본 합성 1호는 앰플로 소분한 후 아무리 가열해도 내용물이 변하지 않는 신기한 모습을 연출했다. 젠바르산은 수많은 매독 환자들에게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살바르산(Salvarsan)은 세계 최초의 화학요법제로 아르스페나민 ,아르세노벤졸이라고도 한다. 1910년 독일힌 P.에를리히가 606번째 도전해 성공했다고 해 606호 라고도 불렸다. 매독은 물론 서교증, 바일병, 회귀열 등의 특효약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부작용이 심해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은 1915년 독자적으로 만들었으며 한국은 23년 후인 1938년에 성공한 것이다. 금강제약이 매독치료제 살바르산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편의 일종인 염산 디하이드로 모르핀과 연관성이 크다.


매독환자에 복음 전해


의사를 고용해 병원을 경영하던 시절 전용순은 일본 오사카 지에제약의 만주 지역은 물론 한국의 총판 대리점을 운영 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일본의 유명한 약품 도매상인 야마기시 천우당에서 잡담을 하던 중 우연히 마약인 염산 디하이드로 모르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야마기시 천우당은 영국 윙크사로부터 염산모르핀을 일본의 미쓰이 물산을 통해 들여와 일확천금을 벌고 종로 3가의 야마사끼약방이 이를 들여와 큰 돈을 벌겠다는 내용이었다.
전용순은 야마기시보다 먼저 이 제품을 들여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즉시 경성약화학연구소를 설립한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진통 진정 진해제로 네오페지날의 품목 허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일본약업자 보다 한발 앞선 것이다. 당시 총독부 약무책임자는 염산디하이드로 모르핀이 수소를 첨가한 유도체인 것을 모르고 허가를 내주었다. 전용순은 네오페지날로 2년여 만에 거부가 됐다. 그는 마약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죄책감을 없애고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매독 치료제 개발에 나선 것이다. 그가 약전품(藥典品)이 아닌 선진기술이 필요한 신약 합성에 나선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마약과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 어쨋든 약업사의 위대한 도전정신과 빛나는 업적은 이런 계기를 바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마약판매 죄책감 덜어


살바르산이나 설파제 같은 신약들은 일본에서도 몇몇 유수한 메이커에서만 성공했을 정도였으니 전용순의 살바르산 성공은 재론의 여지없는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합성에 성공했다고 해서 바로 약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생산이 늦어 짐에 따라 투자비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지만 그는 제약업의 기본인 신약개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익이 60원이면 적어도 20원은 신약개발비에 투입했다. 매출의 3분의 1을 연구비로 투자한 것이다. 지금 국내 제약사들이 매출액의 5% 정도만을 연구비로 쓰는 것과 비교해 보면 전용순의 선구자적인 기질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후세들의 약학교육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동경제대 의학부에 김기우와 김영근을 유학보내기도 했다. 학비는 물론 체제비 일체를 지원 했으며 이들은 국내에 돌아와 약학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 전용순의 금강제약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유한양행 우에무라와 함께 3대 메이커로 군림했던 금강제약은 해방후인 1948년 포도당 주사액 후르덱신 사망사건으로 자진 폐업 했던 것이다. 전용순은 현 제약협회의 전신인 조선약품공업협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국내 제약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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