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분만실이 사라지고 있다. 분만 환자가 없어도 24시간 의료진을 대기시키고 시설을 유지해야 하지만, 현행 수가 체계에서는 분만 건수가 적을수록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다. 산부인과 개원가에는 검체검사 위·수탁 제도 개편에 따른 추가적인 수익 감소 우려까지 더해졌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회장 김재연)는 25일 서울 더그랜드롯데에서 열린 제56차 추계학술대회 기자간담회에서 분만 인프라 유지와 산부인과 진료 정상화를 위한 6대 정책 과제를 발표했다. 이날 의사회는 분만 수가 개선과 검체검사 위·수탁 제도 보완,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에 따른 안전관리 체계 마련, 난임 지원, 의료분쟁 부담 완화, 비대면진료 안전장치 강화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분만실 유지에 월 1억원…"건수 중심 지원으론 버티기 어렵다"
이날 간담회에서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분만실 운영에 필요한 고정비 지원이었다.
분만실은 분만 환자가 없는 시간에도 응급상황에 대비해 의료진이 상시 대기해야 한다. 분만실뿐 아니라 입원실과 신생아실도 함께 운영해야 해 인력과 시설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할 수밖에 없다. 분만 건수가 적은 지방 병원일수록 수입은 제한적이지만 인건비와 운영비는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산부인과의사회 대의원회 이석수 간사는 현장의 비용 부담을 설명하며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간사는 "분만실과 입원실, 신생아실 등 3개 파트를 24시간 교대근무로 운영하려면 최소 30여명의 인력이 필요하다"며 "기본 인건비만 매월 약 1억원이 고정적으로 지출된다"고 말했다.
야간 응급 분만에 필요한 마취 인력 확보도 쉽지 않다. 이 간사는 "지방 소규모 병원은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를 상주시킬 수 없어 야간 응급 분만 때 건당 100만원 이상의 초빙료를 제시해도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정부가 도입한 지역 분만수가 역시 지역 의료기관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간사는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지역 분만수가가 설계되면서 인근 대형병원은 혜택을 보고 중소 분만병원은 어려움을 겪는 구조가 됐다"며 "개별 병원에 얼마를 지급하느냐를 넘어 분만 인프라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고정비를 지원하는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철 부회장도 지역 분만병원의 폐업 원인으로 수익성 악화를 꼽았다.
이 부회장은 "지방의 유일한 분만병원이 사라지는 것은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 아니라 원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가 때문"이라며 "과거 시범사업에서 효과를 봤던 차등 분만 수가제처럼 최소 유지비용을 정부가 보전하지 않으면 향후 5~10년 내에 산부인과 인프라의 맥이 끊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재연 회장은 지역 여건에 따른 파격적인 가산 지원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 회장은 "연간 300건 이하의 분만 기관은 구조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 어렵다"며 "환자가 적은 의료취약지일수록 진료 청구액의 3~5배를 가산 지원하는 등 필수의료 전반에 실질적인 보전책을 도입해야 지역 의료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검체검사 개편에 월 900만원 손실 우려…개원가 부담 가중
분만 인프라 문제와 함께 산부인과 개원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안으로는 검체검사 위·수탁 제도 개편이 거론됐다.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개편안은 위탁검사관리료 폐지와 의원급 보상 비율 조정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의사회는 제도 개편이 시행될 경우 산부인과 개원가의 수익 감소가 불가피하며, 연간 1130억원대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 회장은 "실제 시뮬레이션 결과 의원당 월평균 800만~900만원의 손실이 예상된다"며 "정부가 제시한 보완책만으로는 개원가의 경영 부담을 상쇄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정부는 손실 보전 방안으로 심층상담료와 질강 처치료 기준 완화, 자궁경부세포검사 추가 산정, 진찰료 인상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의사회는 이러한 대책이 실제 산부인과의 경영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는 입장이다.
김 회장은 "정부가 추진하는 필수의료 지원사업은 중증도가 높은 2차 병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며 "일선 분만병원과 개원가가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직접적인 보상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의사회는 검체검사를 단순한 검사 대행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검체 채취에 앞선 문진부터 결과 판독과 설명, 추적 관리까지 의료진의 임상적 판단과 업무가 수반되는 만큼 이를 별도 수가로 보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의사회는 '임상 결과 분석·관리료' 신설을 요구했다. 검체검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료진의 업무와 책임을 보상체계에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다.
임신중지약 도입 앞두고 안전성 논란…"임상 검증과 법 정비 먼저"
정부가 2027년 1분기 도입을 예고한 임신중지 의약품과 관련해서는 안전성 검증과 법적 보호 장치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 회장은 국내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한 가교임상시험과 관련 법령 정비 없이 약물 도입을 추진하는 데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정비와 의료진의 법적 책임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국내 안전성을 검증할 가교임상시험도 거치지 않고 법적 보호 장치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약물을 도입하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한 생체실험과 다를 바 없다"며 "약물 도입에 앞서 안전성과 의료진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의사회는 가교임상시험을 통한 안전성 검증과 복용 전 초음파검사, 약물 사용 후 잔여물 확인을 위한 추적 관찰 체계 마련을 요구했다. 응급상황에 대비한 의료기관 간 이송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의사의 진료 선택권과 처방 거부권을 법적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를 끝으로 임기를 마무리하는 김재연 회장에 이어 제12대 집행부를 이끌 김진학 신임 회장은 산부인과의 진료 기반 회복에 회무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김진학 신임 회장은 "20년간 의사회 활동을 해왔지만 지금처럼 산부인과를 비롯한 필수의료 임상과 전체가 존폐 위기에 처한 적은 없었다"며 "회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사법 리스크 완화와 급여 수가 현실화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Copyright @보건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