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의료 현장을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세계 병원계가 기술 도입을 넘어 환자 중심의 실질적인 의료 혁신을 모색하기 위해 서울에 모였다. 고령화와 의료인력 부족, 의료비 상승, 지역 간 의료격차 등 각국이 공통으로 겪는 위기를 공유하고, 기술 혁신과 국제 협력을 병원의 변화로 연결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다.
국제병원연맹(IHF)과 대한병원협회는 20일 서울 코엑스 마곡컨벤션센터에서 '제49차 IHF 세계병원대회(World Hospital Congress)' 공식 개회식을 개최했다.
이번 대회는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열린다. 세계 90여 개국에서 병원장과 의료기관 최고경영자, 정책 결정자, 임상의, 의료산업 관계자 등 2,000여 명이 참석해 병원 경영과 의료체계의 미래를 논의한다. 한국에서 세계병원대회가 열리는 것은 2007년 제35차 대회 이후 19년 만이다.
대회의 핵심 화두는 AI 시대 병원의 역할과 책임이다. 'Global Learning, Local Action for Every Patient(모든 환자를 위한 글로벌 학습과 현지 실천)'를 주제로 320여 명의 국내외 연자가 참여하는 60여 개 세션이 진행된다. AI·디지털 전환을 비롯해 병원 리더십, 환자안전, 의료의 지속가능성 등 세계 병원계가 직면한 현안을 다룬다.
특히 이번 대회는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도입하느냐보다 이를 의료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환자와 의료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기술 혁신의 성과를 일부 국가나 기관에 국한하지 않고 의료의 질과 접근성을 높이는 데 활용해야 한다는 데에도 공감대가 모였다.
이왕준 조직위원장은 개회식에서 지식 공유를 실제 의료 현장의 변화로 이어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AI가 의료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지만, 기술 자체보다 이를 활용하는 병원 리더의 판단과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가장 중요한 질문은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병원 리더들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라며 "AI를 안전하고 책임 있으며 공정하게 사용하고, 혁신이 환자와 의료진에게 기여하는 동시에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와 의료기관 간 혁신 격차를 줄이기 위한 국제 연대도 강조했다. AI를 비롯한 첨단기술의 혜택이 일부 부유한 국가나 대형 의료기관에 집중되지 않도록 각국이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이를 자국의 의료 환경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 위원장은 이번 대회가 연례적인 국제 교류에 머물지 않고 각국 병원이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해법을 찾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세계바이오서밋과 연계해 의료 AI의 책임 있는 혁신과 국제 연대를 논의하고, 관련 내용을 '서울 선언'으로 구체화하는 방안도 모색할 계획이다.
헨리 가야르도 IHF 회장은 국가마다 의료체계와 언어, 운영 여건은 다르지만 환자와 가족, 지역사회를 돌본다는 병원의 목적은 같다고 강조했다. 각국이 성공 사례뿐 아니라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까지 공유해야 공통의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병원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진료의 질뿐 아니라 의료인력과 자원, 환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짚었다. AI와 디지털 인프라, 인력 운영, 에너지·폐기물 관리, 진료 경로와 병원 운영 효율성을 개별 과제가 아닌 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경하 대한병원협회 회장도 AI 시대 의료 혁신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환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AI는 질병 진단과 환자 상태 예측, 의료진의 임상 판단과 업무를 지원할 수 있지만, 의료의 본질인 인간적 이해와 공감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유 회장은 "AI는 임상 결정을 지원하고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지만, 환자 개개인의 삶과 존엄성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공감, 신뢰, 존중을 대체할 수는 없다"며 "기술은 목적지가 아니라 의료를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접근하기 쉽게 만드는 도구"라고 말했다.
AI 활용의 성과 역시 기술 도입 자체가 아니라 환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의료진의 반복적인 업무 부담을 줄이고 환자를 직접 돌보는 시간을 늘리는 한편, 진료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의료가 직면한 과제도 제시됐다. 국내 의료계는 선진 의료기술과 병원 인프라,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의료인력 부족과 지역 간 의료격차, 필수의료 접근성, 병원 운영의 지속가능성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기술 발전을 의료체계 전반의 개선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현장 운영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논의가 국내 의료에도 시사점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형훈 보건복지부 차관은 축사에서 고령화와 지역 간 의료격차, 의료비 상승 등 세계 보건의료계가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차관은 정부가 필수의료를 강화하고 국민이 거주 지역에서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역 보건의료체계 구축에 힘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AI와 의료데이터를 활용한 혁신 역시 환자 치료의 질과 서비스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하며, 궁극적으로 환자안전과 의료의 질,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대회에서는 AI 전환과 병원 운영 혁신뿐 아니라 환자안전, 재정 지속가능성, 의료인력과 지역·필수의료 등 병원계의 주요 현안을 놓고 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세계 각국 병원의 혁신 사례를 공유하는 IHF 어워드 시상식과 병원 견학, 의료기술 전시, 국제 네트워킹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21일부터 22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2026 세계바이오서밋'과 연계한 논의도 예정돼 있다. 의료 AI의 책임 있는 활용과 글로벌 연대 방안을 함께 모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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