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역·필수의료 강화와 의료혁신을 핵심으로 한 보건의료 정책을 제시한 가운데 의료계 수장들이 의료개혁의 방향보다 '소통'과 '신뢰 회복'이 먼저라며 일제히 쓴소리를 쏟아냈다.
의료개혁의 큰 방향을 제시한 것은 의미가 있지만, 과거 의정갈등에서 드러난 일방적 정책 추진을 반복해서는 안 되며 의료계를 정책의 대상이 아닌 파트너로 인정하는 구조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의료계는 이재명 정부가 윤석열 정부 시절 의정갈등을 반면교사 삼아 정책 초기 단계부터 의료계와 충분히 소통하고 사회적 합의를 구축하는 것이 의료개혁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한의사협회는 11일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제43차 종합학술대회에서 '이재명 정부 보건의료정책, 기대와 현실' 세션을 개최했다.
이날 이형훈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 새 정부 보건의료 정책 방향을 발표한 데 이어 김택우 대한의사협회장, 이진우 대한의학회장, 이석환 한국정책학회장, 유경하 대한병원협회장이 패널토론을 통해 정부 의료개혁 방향에 대한 제언을 쏟아냈다.
정부가 지역·필수의료 강화와 AI 기반 의료혁신, 의료인력 양성체계 개편 등을 의료개혁의 핵심 과제로 제시한 데 대해 참석자들은 정책 목표에는 공감하면서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역·필수의료 복원…AI 기반 미래의료 체계 구축"
먼저 이형훈 차관은 정부 보건의료정책의 핵심 방향으로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 ▲의료인력 양성과 수련체계 혁신 ▲AI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 육성 ▲보건의료산업 경쟁력 강화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한 의료개혁 등을 제시했다.
또 의료혁신위원회를 중심으로 의료계와의 대화를 이어가며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를 구축하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의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 차관은 "앞으로의 의료개혁은 정부 혼자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계와 국민, 전문가가 함께 논의하며 만들어 가야 한다"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의료현장이 공감하는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AI와 초고령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의료데이터 활용 기반을 확대하고 디지털 기술을 의료현장에 접목하는 한편, 지역과 필수의료 기반을 회복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 혼자 하는 의료개혁은 실패"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인 김택우 대한의사협회장은 의료개혁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단기 정책이 아닌 국가 차원의 장기 보건의료 청사진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의료전달체계와 의료인력, 건강보험 재정, 의학교육을 하나의 틀에서 설계하는 국가 보건의료 5·10개년 계획 수립을 제안하면서, 무엇보다 정책 설계 초기부터 의료전문가가 참여하는 거버넌스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보건부 분리·독립 또는 대통령실 보건의료수석 신설, 대통령 직속 보건의료정책 협의체 설치 등을 통해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 추진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회장은 "지역·필수의료는 의사를 강제로 보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의료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며 "정부와 의료계는 정책을 함께 설계하는 동반자이며, 의료정책의 종착점은 결국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AI 시대를 대비한 데이터특별법 제정과 건강보험 재정 정상화, 적정수가 체계 구축 등을 제안하며 "숫자 중심 정책이 아니라 교육의 질과 의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좋은 정책도 신뢰 없으면 실패… 의정갈등이 증명"
이진우 대한의학회장은 정부가 제시한 지역·필수의료 강화라는 정책 목표에는 의료계도 공감하지만, 지난 2년간의 의정갈등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은 '신뢰 없는 의료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좋은 목표만으로 좋은 정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난 2년 동안 모두가 경험했다"며 "의료정책은 의료현장의 공감과 참여 없이 성공할 수 없고, 정부는 의료계를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 파트너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신뢰 회복의 출발점은 경청"이라며 "형식적인 의견 수렴이 아니라 의료계 의견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의료개혁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의료정책도 공급 확대 중심에서 의료수요 관리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지역의료 위기는 단순히 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료전달체계와 낮은 보상, 열악한 정주여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정부가 의사 수 확대에만 집중하기보다 일차의료 강화와 예방 중심 의료, 의료전달체계 정상화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개혁은 사회적 합의 문제"
정책학계도 의료개혁의 핵심은 절차적 신뢰라고 진단했다.
이석환 한국정책학회장은 의료개혁을 대표적인 사회적 난제로 규정하며, 의료에서 말하는 '인폼드 컨센트(Informed Consent)'를 넘어 사회적 갈등에서는 '인폼드 디센트(Informed Dissent)', 즉 충분히 논의한 뒤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목표에는 공감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표명하고 경청하는 절차가 부족했다"며 "의료개혁은 속도보다 사회적 합의와 절차적 정당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AI를 활용해 정책 시행 이후 의료환경 변화와 정책 효과를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공론화 과정에 활용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필수의료는 국가 기반산업…현장 목소리 반영해야"
유경하 대한병원협회장은 지역·필수·응급의료를 국가 기반산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필수의료 위기는 의사 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적정 보상과 근무환경, 배후진료체계가 뒷받침되지 못한 구조적 문제"라며 "소아청소년과처럼 지원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아무리 재정을 투입해도 회복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료인력 정책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세부전문의와 지역별 의료환경까지 고려한 장기 계획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의료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새 정부가 제시한 지역·필수의료 강화와 의료혁신이라는 정책 방향에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윤석열 정부 시절 의정갈등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참석자들은 의료개혁은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며, 정책 초기부터 의료계와 충분한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의료계를 정책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인정하고 국가 보건의료의 장기 청사진을 함께 설계할 때 비로소 국민이 체감하는 지속가능한 의료개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뜻을 같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