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사 업무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둘러싸고 의료계와 치과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의사와 치과의사 200여명은 19일 국회 앞에 집결해 "환자 안전을 위협하고 의료체계 근간을 흔드는 졸속 입법"이라며 의료기사법 개정안 철회를 촉구, 강경 투쟁을 예고했다.
대한의사협회(회장 김택우)와 대한치과의사협회(회장직무대행 이정우)는 이날 오후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의료기사법 개정 결사 저지 전국 의사·치과의사 대표자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의료기사법 개정 논의 중단과 법안 철회를 촉구했다.
이날 집회에는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치과의사협회를 비롯해 대한재활의학회, 대한재활의학과의사회, 대한정형외과의사회 등 의료계 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환자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졸속 입법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개정안은 현행법상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수행하도록 규정된 의료기사 업무를 '처방' 또는 '의뢰'만으로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돌봄통합지원법)' 시행과 방문재활 확대를 이유로 개정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의료계는 의료현장의 책임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처방만으로는 환자 상태 변화 대응 불가능"
의료계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환자 상태 변화에 대한 즉각적 대응과 책임 구조의 붕괴다.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의료는 단순히 처방전 한 장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니다"라며 "환자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위험성을 재평가하며 응급상황 발생 시 즉각 개입할 수 있어야 안전한 의료체계가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사의 지도 없이 처방과 의뢰만으로 의료기사가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 환자 상태 변화에 대한 대응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며 "특히 의료기관 밖에서 이뤄지는 방문재활 과정에서는 환자 안전 공백이 더욱 커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또 "이미 정부 시범사업을 통해 의사의 지도 체계 안에서도 돌봄통합과 방문재활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원격지도 방식 등 합리적 대안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의료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명확해질 수 있다는 점도 핵심 문제로 제기됐다.
김교웅 대한의사협회 대의원회 의장은 "의사의 지도 없이 의료기사가 업무를 수행하다 사고가 발생하면 의사는 환자 상태 변화를 알 수 없었다고 하고, 의료기사는 처방대로 시행했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라며 "결국 피해는 환자와 가족이 떠안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어 "환자의 안전보다 직역 확대 논리가 앞서는 입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치과계 "전문가 의견 무시한 위험한 입법"
치과계 역시 이번 개정안이 의료현장 혼란과 국민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이정우 회장 직무대행은 대회사를 통해 "현재 국회가 추진 중인 의료기사법 개정은 보건의료체계의 근간을 흔들고 대한민국 의료 수준과 국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위험천만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 직무대행은 "현재 의료기사는 의사와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제한적으로 의료행위를 수행하고 있다"며 "만약 의료기사 업무가 지도 없이 단순 처방·의뢰만으로 가능해진다면 예측 불가능한 독단적 조치와 부실 진료가 발생할 수 있고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대한치과의사협회는 이번 의료기사법 개정에 절대 반대한다"며 "대한민국 의료인들과 함께 국민 건강권 수호를 위해 강력히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의료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언한 전문가들"이라며 "국민 건강권이 위협받고 진료 시스템 붕괴가 우려되는 지금, 의료인들이 가장 앞장서 목소리를 내고 막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생명은 정치적 타협 대상 아니다"
이들은 특히 이날 오후 열리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제1법안심사소위원회 일정과 관련해서도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당초 예정에도 없던 법안소위가 급작스럽게 열리게 된 배경에는 의료기사단체의 압박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크다는 것. 또 환자 안전과 직결된 법안을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밀어붙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날 집회에서는 법안 강행 처리 시 강력한 연대 투쟁에 돌입하겠다는 경고도 이어졌다.
황규석 서울특별시의사회 회장은 투쟁사에서 "의료는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인기영합적 정책으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황 회장은 "의료 현장에서 환자의 생명을 직접 책임져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의료체계를 흔드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며 "대한민국 의료체계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법안 통과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서울시의사회 4만 회원과 전국 14만 의사는 국민 건강권 수호를 위해 끝까지 대응할 것"이라며 "졸속 입법 시도가 중단되지 않는다면 의협과 치협을 비롯한 의료계가 총결집해 강력한 연대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의료계는 돌봄통합체계 구축과 방문재활 활성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다만 환자 안전과 면허체계의 기본 원칙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충분한 논의와 제도적 보완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