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 필수의약품의 반복적인 품절 사태가 이어지면서 전국 소아청소년병원들이 "응급 소아 진료 체계가 붕괴 직전"이라며 정부에 공급 안정 시스템 구축과 약가 현실화를 강하게 촉구하고 나섰다.
특히 열성경련 치료 필수 주사제인 '아티반' 재고가 바닥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정부 대응이 뒤늦게 이뤄졌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현장에서는 "사후 대응 중심의 '부랴부랴 행정'을 이제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회장 최용재·의정부 튼튼어린이병원장)는 지난 16일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아 필수약 공급 불안 실태와 함께 제도 개선 방안을 공개했다.
협회는 "소아 필수약 문제는 단순 품절이 아니라 국가 필수의료 안전망 붕괴 문제"라며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아이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응급환자 처치 불가"… 아티반 재고 바닥 현실화
우선 협회가 전국 소아청소년병원 35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병원의 34%(12곳)는 이미 아티반 재고가 모두 소진돼 응급 환자 발생 시 처치가 불가능한 '심각' 단계라고 답했다. 또 37%(13곳)는 1~2개월 내 재고 소진이 예상되는 '위기' 상태라고 응답해, 전체의 71%가 사실상 공급 절벽 상황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현장에서는 약을 구하지 못해 환자를 타 병원으로 전원하거나, 인근 병원끼리 약품을 나눠 쓰며 버티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다. 응답 병원의 43%는 "대체 약물 사용에 따른 부작용 우려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답했고, 27%는 보호자들에게 품절 상황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최용재 회장은 "아티반 공급 중단 선언 이후 1년 6개월이 지났지만 정부는 뚜렷한 대책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며 "최근 들어서야 기술 이전과 위탁생산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재생산 시점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식약처가 조속 심사를 약속하더라도 위탁생산 협상과 안정 유통까지는 최소 6~12개월이 소요된다"며 "재고가 바닥난 병원들은 앞으로 수개월 동안 응급 진료 공백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먹는 약으로 대체?"… 현장 "탁상행정" 반발
정부는 미다졸람이나 디아제팜 등 대체 약제가 존재한다는 입장이지만, 현장 의료진들은 "임상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실태조사에서 응답 병원의 69%는 정부의 대체 가능 주장에 대해 "환아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발상"이라고 답했고, 17%는 "치료 실패 책임을 현장 의사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기존 약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는 응답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의료진들은 아티반이 단순 진정제가 아니라 소아 경련 치료의 '1차 선택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티반은 신속한 작용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호흡 안전성 덕분에 열성경련과 간질중첩증(Status Epilepticus) 치료에 필수적으로 사용돼 왔다.
협회는 "미다졸람은 호흡 억제 위험이 있고, 디아제팜은 체내 축적 문제가 있어 소아 환자에서 동일한 안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현장에서는 사실상 대체 불가능한 약"이라고 설명했다.
"410원짜리 생명줄"… 초저가 구조가 만든 공급 붕괴
협회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초저가 약가 구조와 공급망을 고려하지 않은 규제 정책을 지목했다.
실제 아티반은 앰플당 약가가 782원 수준에 불과하다. 또 다른 필수약인 하이드로코르티손 주사제 '코티소루주' 역시 신생아 1회 투여 기준 약가가 410원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러나 정부는 GMP(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 강화와 생동성 재평가 등 규제를 확대하면서도, 이에 따른 생산 원가 상승분은 약가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 협회의 주장이다.
최용재 회장은 "소아 필수약은 저출산으로 사용량 자체가 적기 때문에 제약사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거의 없는 구조"라며 "국가가 필수의약품을 시장 논리에만 맡겨 놓고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홍준 부회장(김포 아이제일병원장)도 "벤토린, 풀미코트, 시럽 해열제와 항생제 등도 매년 반복적으로 품절되고 있지만, 누구 하나 시스템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며 "이번 아티반 사태는 예견된 공급 붕괴"라고 지적했다.
"사후 대응 말고 사전 시스템 구축해야"
협회는 반복되는 공급 대란을 막기 위해 '사후 대응'이 아닌 '사전 대응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선 제약사가 공급 중단을 보고할 경우 식약처·복지부·심평원 등이 자동으로 공동 대응에 착수하는 '자동 트리거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는 공급 중단 보고 이후에도 부처별 검토 과정만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리면서 대응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필수의약품 공급 영향평가 의무화 ▲규제 강화 시 약가 자동 연동 시스템 도입 ▲국무조정실 중심 범부처 통합 컨트롤타워 구축 ▲초저가 필수약 원가·관리비 100% 보전 등을 핵심 대책으로 제시했다.
한동균 부회장(광주시 남구 미래아동병원장)은 "소아 필수약은 국가 보건안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아이들이 성인약을 쪼개 먹거나 약이 없어 응급실을 전전하는 상황이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소아라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이기 때문에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