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성 혈액암인 다발골수종에서 암 발생 이전 단계인 '전구질환'을 미리 진단하고 체계적으로 추적 관리한 환자들이, 증상 발생 후 곧바로 진단된 환자보다 유의하게 더 오래 생존한다는 사실이 국내 대규모 보건의료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처음으로 입증됐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박성수·민창기 교수(혈액내과)와 가톨릭대학교 약리학교실 한승훈·최수인 교수 연구팀은 2009년부터 2022년까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전 국민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활용한 후향적 코호트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Blood Cancer Journal에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영국 옥스퍼드대병원 혈액내과 카르티크 라마사미 교수와의 국제 공동연구로 수행돼 결과의 신뢰성을 높였다.
연구팀은 단클론감마글로불린혈증(MGUS) 환자 5500명과 무증상·증상성 다발골수종 환자 1만7809명 중 △MGUS에서 다발골수종으로 진행한 환자 199명 △무증상 다발골수종에서 증상성으로 진행한 환자 447명 △전구질환 진단 없이 곧바로 다발골수종으로 진단된 환자 1만5067명을 선별해 생존기간을 비교 분석했다.
MGUS와 무증상 다발골수종은 혈액이나 골수에서 비정상적인 단백질이나 형질세포가 관찰되지만, 뼈 통증, 빈혈, 신부전 등 명확한 장기 손상이 나타나지 않은 전구 단계다. 이 시기에는 항암치료 대신 정기 검사와 경과 관찰을 통해 질병 진행 여부를 살피는 것이 일반적이다.
분석 결과, 나이와 동반 질환 등 여러 요인을 보정한 뒤에도 전구질환 단계부터 추적 관찰을 받은 환자들의 생존기간이 유의하게 길었다.
MGUS를 거쳐 다발골수종으로 진행한 환자의 전체 생존기간 중앙값은 약 7.9년, 무증상 다발골수종을 거친 환자는 약 5.5년이었으며, 전구질환 진단 없이 바로 다발골수종으로 진단된 환자는 약 4.4년에 그쳤다.
연구팀은 모든 환자를 '증상이 발생해 치료를 시작한 시점'부터 동일하게 추적해, 단순히 진단 시점이 빨라 생존기간이 길어 보이는 '리드타임 효과'를 최대한 보정했다. 그 결과 MGUS에서 진행한 환자의 사망 위험은 바로 다발골수종으로 진단된 환자보다 약 47%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구질환 단계부터의 체계적 관리가 실제 치료 예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다만 연구진은 이번 결과를 근거로 전 국민 대상 선별검사를 확대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MGUS와 무증상 다발골수종은 진행 속도가 느리고, 모두가 암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연령, 동반 질환, 기존 검사 결과 등을 종합해 고위험군을 중심으로 한 선별과 추적 전략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민창기 교수는 "이번 연구는 '어차피 치료는 증상 이후에 시작하는데, 전구질환을 미리 아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라는 오랜 논쟁에 실제 환자 데이터를 통해 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전구 단계부터 관리받은 환자들이 실제로 더 오래 생존한다는 사실을 전국 단위 자료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는 "전구질환 단계부터 정기 검사와 위험도 평가, 합병증 예방 교육을 받은 환자들은 다발골수종으로 진행하더라도 보다 안정적인 상태에서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며 "혈액병원의 선제적 추적 진료 모델이 생존율 차이로 이어진다는 점을 확인한 만큼, 맞춤형 관리 전략을 더욱 고도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다발골수종은 골수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혈액암으로, 국내에서 매년 2000명 이상이 새롭게 진단된다. 환자의 80% 이상이 60대 이상으로 고령 인구 증가와 함께 발생률이 꾸준히 늘고 있다. 최근 치료제 발전으로 생존율이 개선됐지만 재발이 잦고 치료 저항성이 문제로 남아 있다.
한편 국내 최초로 혈액병원을 설립한 서울성모병원은 환자 맞춤형 치료 설계와 면역항암제 선제 도입을 통해 정밀 치료 체계를 구축해 왔다. 서울성모병원의 다발골수종 환자 중앙 생존기간은 80.5개월로 전국 평균 대비 약 1.5배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