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되고,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요."
희귀 난치성 질환인 과호산구증후군(Hypereosinophilic Syndrome, HES)으로 8년간 투병해 온 소아 환아가 어머니의 간과 조혈모세포를 차례로 이식받는 치료를 통해 면역억제제 없이 건강한 일상을 되찾았다. 국내에서 소아 과호산구증후군 환자에게 간·조혈모세포 순차 이식을 통해 면역관용을 유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희귀 난치 질환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사례로 평가된다.
서울아산병원은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김혜리 교수, 소아청소년전문과 오석희 교수, 소아외과 남궁정만 교수팀이 과호산구증후군으로 간경변증이 진행된 유은서(여, 13세) 양에게 어머니의 간과 반일치 조혈모세포를 순차적으로 이식한 결과, 면역억제제를 완전히 중단한 상태에서도 간 기능과 조혈 기능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면역관용(immune tolerance)' 상태를 성공적으로 유도했다고 밝혔다.
과호산구증후군은 백혈구의 한 종류인 호산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심장, 폐, 간 등 주요 장기를 공격하는 희귀 질환이다. 은서 양의 경우, 호산구가 지속적으로 간을 침범하면서 간경변증과 간부전으로 악화돼 결국 간이식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질환의 근본 원인이 골수에서 비정상적인 호산구가 계속 생성된다는 점이었다. 단순 간이식만으로는 질환의 재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고, 평생 면역억제제 복용이 불가피했다. 이에 의료진은 질환의 근본 원인과 이식 후 합병증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치료 전략을 선택했다.
의료진은 2024년 8월 어머니의 간을 이식한 뒤, 2025년 2월 동일 공여자인 어머니로부터 반일치 말초혈 조혈모세포(Haplo-PBSCT)를 이식했다. 동일 공여자의 장기와 조혈모세포를 순차적으로 이식함으로써 환자의 면역 체계 자체를 공여자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이 치료법의 핵심은 '면역관용'이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면역 세포가 이미 이식된 간을 외부 장기가 아닌 '자기 조직'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장기 거부반응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 결과 평생 복용해야 했던 면역억제제를 완전히 중단할 수 있었다.
성인 환자에서는 유사한 방식의 치료가 제한적으로 보고된 바 있으나, 면역 반응이 더욱 예민하고 이식 후 합병증 위험이 높은 소아 환자, 특히 과호산구증후군과 같은 희귀 난치 질환에서 성공한 사례는 국내 최초이자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성과로 평가된다.
은서 양은 2017년 과호산구증후군 진단 이후 소장 천공으로 인한 장루 조성술 등 여러 차례 수술과 치료를 겪었다. 이후 간경변증이 진행돼 2023년 식도정맥류 출혈, 2024년 복수 등 간부전 합병증이 잇따라 발생하며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간·조혈모세포 순차 이식 이후 상태는 빠르게 안정됐다. 은서 양은 2025년 10월 면역억제제 복용을 완전히 중단했으며, 최근 시행한 간 조직검사에서도 정상 소견이 확인됐다. 특히 환자 체내 혈액세포가 100% 공여자 세포로 대체된 '완전 공여자 키메리즘'이 확인돼, 더 이상 비정상적인 호산구가 생성되지 않는 상태임이 입증됐다.
은서 양의 어머니 박 모 씨(가명)는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해 식사 시간조차 제한받던 아이를 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며 "이제는 약 없이 친구들과 자유롭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꿈만 같다. 의료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교수는 "이번 사례는 희귀 난치성 질환의 근본 치료와 이식 후 면역관용 유도를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비슷한 질환으로 고통받는 소아 환아와 가족들에게 새로운 치료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