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사태와 코로나19라는 두 차례의 위기를 견뎌온 대한민국 응급의료가 이제는 '인력 절벽'이라는 구조적 한계 앞에 섰다. 미래 교수 인력의 산실인 응급의학과 전임의(펠로우)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고, 전공의 지원율마저 급락하면서 응급의료 체계 전반이 붕괴 직전이라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한응급의학회(이사장 전병조)는 22일 서울 컨퍼런스하우스 달개비에서 '2026년도 신년 기자회견'을 열고, 응급의료 현장의 인력 실태를 공개하며 제도 전면 재설계를 촉구했다.
지난 1월 1일 취임한 전병조 신임 이사장은 "응급의료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서, 이제는 해결의 중심에 서야 할 시점"이라며 "현장을 살릴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전공의 지원율 60% 턱걸이... 지방은 50% 수준"
학회가 이날 공개한 긴급 실태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57개 응급의학과 수련병원을 대상으로 전임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 84%에 해당하는 48개 병원에서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임의는 향후 대학병원 교수와 지역 거점 응급의료를 책임질 핵심 인력으로, 이들의 공백은 곧 응급의료의 미래 붕괴를 의미한다는 것이 학회의 진단이다.
전공의 수련 상황 역시 심각했다. 이태헌 교육이사에 따르면 2026년도 응급의학과 신입 전공의 모집에서 정원 160명 중 106명만이 지원해 지원율은 66.2%에 그쳤다. 특히 비수도권 지원율은 50.8%로, 지방 응급의료 인력 공급이 사실상 끊길 위기에 놓였다.
유연호 수련이사는 "전공의가 줄면 교수의 업무 부담이 가중되고, 이는 다시 수련 환경 악화로 이어진다"며 "현재 응급의학과는 인력 이탈과 기피가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다"고 토로했다.
이경원 공보이사도 "전임의가 없다는 것은 향후 5년, 10년 뒤 지역 거점 병원을 지킬 지도자가 사라진다는 뜻"이라며 "암 환자에게 주는 혜택만큼 응급의료에도 파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소아과·산부인과에만 지급되는 전임의 수련보조수당을 응급의학과로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법 리스크 해결 없인 환자 안전도 없다"
학회는 응급의료 인력 붕괴의 핵심 원인으로 '과도한 사법 리스크'를 지목했다.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 응급 진료에도 형사 처벌과 면허 취소 위험이 상존하면서, 젊은 의사들이 응급의학과를 기피하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공의 시절 대동맥 박리를 오진했다는 이유로 10년 넘게 재판을 받고 면허가 취소된 전문의 사례는 현장에 깊은 공포로 남아 있다.
이경원 공보이사는 "해당 회원은 집행유예가 끝났음에도 의료법에 따라 2027년에야 면허 재교부 신청이 가능하다"며 "젊은 의사들이 응급의학과를 기피하는 결정적 이유가 바로 이 '사법적 공포'다.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도 의료진이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법적 보호 장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무조건 수용? 배후 진료 없으면 불가능... '통합형 체계'가 답"
학회는 최근 정치권에서 추진 중인 '응급실 수용 거부 금지' 관련 법안에 대해서도 학회는 강한 우려를 표했다.
배후 진료 역량이 없는 상태에서 환자를 무조건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의료진에게 책임만 떠넘기는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이를 두고 송경준 기획이사는 "응급실 미수용 문제의 본질은 결정 당사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환자를 치료할 배후 능력이 있느냐"라며 "단순히 권역 내에서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넘어 기능별로 환자를 책임지는 '통합형 응급의료 체계(ACO)'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대동맥 박리처럼 발생 빈도는 낮지만 치명적인 질환의 경우, 행정 구역을 넘어 광역 단위로 당직 체계를 운영하고 최종 치료를 책임지는 병원을 지정하는 방식이다.
특히 정부가 추진 중인 '타과 전문의 응급실 투입' 구상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전병조 이사장은 "중증 환자 진료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인력으로 응급실을 채우는 것은 진료의 질 저하를 불러올 뿐"이라며 "이는 인력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에 불과한 편법"이라고 비판했다.
전 이사장은 또 "인력 확보는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학회는 故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을 추모하며, 그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형 응급의료 체계를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중앙응급의료센터의 독립성 강화 필요성에 대해서도 향후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