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의 상처 위에 다시 마주 앉은 의료계와 정부가 '필수의료 붕괴'라는 공동의 위기를 확인, 의료시스템 재건을 위한 소통과 협력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다. 의료계는 속도와 숫자 중심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정부와 국회는 구조 개편과 신뢰 회복 없이는 의료의 지속 가능성이 없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의료계와 정부는 신년하례회를 통해 2026년을 '의료 정상화의 분기점'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정부와 여야 국회 역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며 의료개혁 동참을 약속했다.
대한의사협회(회장 김택우)와 대한병원협회(회장 이성규)회는 8일 서울 이촌동 의협회관에서 '의료계 신년하례회'를 열고, 국민 건강과 의료 안전, 의료시스템 전반의 재건을 위한 사회적 연대를 공식화했다.
"폐허 속에서 버텼다… 안전한 진료환경 의료개혁 출발점"
먼저 김택우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지난 2년간의 의정 갈등을 "의료계 전체가 폐허 위에서 버텨온 시간"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의료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합리적 검증과 숙의가 배제된 채 속도전이 반복된 점을 의료 위기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했다.
김 회장은 "의사 수 추계는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라 의료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며 "외국에서는 수년간 인구 구조, 질병 양상, 의료 이용 행태, 기술 변화 등을 반영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과 몇 개월 만에 결론을 내려 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의대 증원 이후 교육과 수련 환경이 오히려 악화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학생 수는 늘었지만 교육비 지원과 인프라는 제자리"라며 "교수진의 과중한 부담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과 수련이 가능한지, 의료의 질을 담보할 수 있는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군의관·공중보건의 수급 불안,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지연, 의료현장 안전 문제도 함께 언급했다.
김 회장은 "의학 교육과 수련, 진료 현장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필수의료는 유지될 수 없다"며 "의사들이 안전하게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의료 개혁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경쟁 아닌 분담으로, 의료전달체계 근본 개편해야"
이성규 회장은 의료 위기의 구조적 원인으로 무한 경쟁 중심의 의료전달체계를 지목했다.
이 회장은 "비상진료 체계는 일단락됐지만, 현장의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며 인건비·물가 상승, 의료 인력 불균형, 지역 필수·응급의료 공백, 저출산·초고령화로 인한 환자 쏠림 현상을 열거했다.
그는 "병상과 고가 의료장비의 과잉 투자로 자원은 낭비되고, 정작 필수의료는 공백 상태에 놓여 있다"며 "의료는 경쟁이 아니라 조화와 분담의 체계 위에서 작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의사 인력 정책 역시 전국 단위 총량 추계가 아닌, 지역·전문과목별 중장기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법적 리스크 완화와 재정 지원이 병행되지 않는 한 필수의료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다.
정부 "신뢰 기반 개혁… 지금이 마지막 기회"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계의 문제 인식에 공감을 표하며, 지역 필수 공공의료 강화를 핵심 국정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지난 갈등의 시간에도 의료시스템을 지켜낸 것은 현장의 의료인들이었다"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의료·돌봄 수요 폭증, 응급·분만 등 필수의료 공백, 농어촌 지역의 1차 의료 붕괴 위기를 언급하며 "재정 지속 가능성과 의료전달체계 개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지역 필수 공공의료 강화를 핵심 국정 과제로 삼고 있다"며 "지역 필수의료 특별회계 조성, 지역의사제 도입, 필수의료에 대한 적정 수가 보상과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을 통해 의료 격차 해소와 필수의료 역량 강화를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의료계의 참여와 협력은 필수적"이라며 '동주공제(同舟共濟)'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에 △지역 필수의료 특별회계 △지역의사제 △필수의료 적정 수가 보상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국립대병원·공공의료기관 육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정 장관은 "지금이 의료를 개혁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고, 마지막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정부도 공유하고 있다"며 "어려운 정책 여건 속에서 국민이 바라고 의료계가 공감하는 국민 중심의 보건의료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정부는 진정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의료계와 충분히 협의해 나가겠다. 정부의 이런 노력에 의료계도 함께 노력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단기간에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것인가"라며 "최선의 방안은 알겠지만 그것이 실행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여기 오신 많은 전문가분이 의견을 주셔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여야 한 목소리 "필수·지역·공공의료 살리겠다"
여야 국회의원들도 의료계 앞에 나서 초당적 협력을 약속했다. 또한 의료계와 대립 구도를 넘어 협력적 파트너십을 통한 의료개혁을 모색하겠다는 의견도 함께 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의정 갈등 이후 흔들린 의료시스템 정상화와 필수의료 회복을 위한 정치권의 책임을 강조했다.
서영교 의원은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이 행복해야 국민도 안전하다"며 "입법과 예산으로 의료계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전현희 의원도 의료계와의 오랜 인연을 언급하며, 의료계와 정치권 간 지속적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실손보험 제도 개선 논의와 사무장병원 근절 입법 과정에서 의료계와 협력해 온 경험을 언급하며, "의료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현안 해결을 위해 의료계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박희승 의원은 지역 의료 현실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입장을 강조하며 "지역에서 의료인이 사라질 경우 주민의 생명권 자체가 위협받는다"며,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료 확충 논의 과정에서 의료계와의 충분한 협의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김윤 의원은 의사 인력 수급 추계 논의와 관련해,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정책 결정의 필요성을 전하며 "과거 일방적 의대 증원 정책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마련된 것이 의사 인력 수급 추계위원회"라며, 투명한 논의 구조 속에서 의료계와 국회가 함께 합리적인 결론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도 의료개혁의 방향으로 속도 조절과 신중한 정책 설계, 의료인의 자율성과 안전 보장을 공통적으로 강조했다.
나경원 의원은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과 필수의료 체계 유지는 국회의 책무"라며, 건보공단 특사경 도입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서명호 의원은 "의료인은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라며, 향후 의료 정책 수립과 실행 과정에서 의료계와의 협업이 필수적임을 분명히 했다. 이와함께 의료계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대안이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국회 차원에서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한지아 의원은 충분한 소통 없는 제도 변화가 의료 현장의 혼란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모든 정책은 선의에서 출발하지만, 의료처럼 생명과 직결된 영역에서는 부작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며 "돌다리도 두드려 가는 심정으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예지 의원은 "의료계의 목소리는 생명의 언어"라며, 의료 현장의 문제의식이 국회를 통해 국민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도록 입법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도 축사를 통해 의료개혁은 '속도'가 아니라 '정합성'과 '현장 수용성'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의료는 숫자나 구호로 움직이는 영역이 아니라, 현장을 지탱하는 구조와 신뢰가 함께 작동해야 하는 전문 영역"이라며, 일방적 정책 추진이 의료체계 전반의 불안을 키워왔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그는 "의료개혁은 정부와 의료계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국민 생명과 직결된 공동 과제"라며 "개혁신당은 의료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에서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이날 신년하례회에는 국민의 힘 나경원 의원,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의원,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 더불어민주당 박희승 의원, 국민의힘 서명옥 의원, 더불어민주당 김윤 의원, 국민의힘 한지아 의원,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 등 국회의원 다수가 참석해 새해 인사를 건냈다. 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 정은경 장관과 정경실 보건의료정책 실장이 참석했다.
이 외에도 대한의학회 이진우 회장, 한희철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 이사장, 오태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장, 서울시의사회 황규석 회장, 대한병원의사협의회 주신구 대한중소병원협회 김진호 회장, 대한병원협회 이왕준 부회장, 한국여자의사회 홍순원 회장,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노연홍 회장, 대한방사선사협회 한정환 회장, 대한응급구조사협회 강용수 회장, 대한간호조무사협회 곽지연 회장 등이 참석했다.